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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 스레드
머큐리는 로마 신화에서 가장 민첩한 신이다. 지상과 지하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는 판테온에서 기동력이 가장 뛰어나다.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만들어내는 재간꾼이기도 하다. 지적으로, 언어적으로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통렬한 유머를 통과한다.
“유연하고 싶어요. 제 주위 상황 변화에 맞춰 변화하고 싶고요. 철학이 있는 작가보단 적응하는 작가가 되고 싶네요.”
매번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작가는 없다.
하지만 “철학”의 부재에 따르는 두렵고 아찔한 가능성을 즐길만큼 “유연”한 작가는 드물다.
몇 십여 년의 작품 활동 기간 동안 미디어 아티스트 이종철 작가는 작품의 외양과 느낌을 주저 없이 바꾸어 왔다.
미디어 아티스트라 불리지만 이종철 작가의 매체는 전통적 캔버스 회화부터 최근 AI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이미징을 아우른다. 매 작품이 이전 작품들에서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통찰을 담는 까닭에 그의 작품 세계에서 즉각 눈에 띄는 사회적 혹은 역사적 주제를 찾기란 어렵다.
변화에 응답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몇 분 간격으로 업데이트되는 뉴스를 따라가 본 적이 있다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것이다.
변화에 적응하는 건 더 어렵다. 화면을 스크롤하는 엄지 손가락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부지런하고 지적으로 창의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둘 모두에서 끈기 있어야 한다.
이종철 작가는 매 작품마다 변신하면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그는 민첩하다.
서늘한 가을 날 갤러리 자인제노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이종철 작가를 만났다. 흰 티셔츠에 카고 바지, 데님 점퍼의 유연하면서도 깔끔한 차림의 그는 경쾌하고 산뜻하게 유창했다.
작가는 그의 작품과 살아온 날들, 일종의 사업가 정신, 그리고 “유연한” 작가로 사는 데에 따르는 즐거움과 어려움에 대한 갖가지 빛깔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종철 작가는 주위 공간을 채우는 드문 힘을 지녔다. 그는 생기 넘치는 이야기와 자신의 예술적 방향에 대한 겸손하지만 단단한 확신을 지금 들어선 곳에 안고 온다. 그 확신에는 이야기 나누는 사람을 사로잡는 장난기 어린 야심 한 자락이 담겨있다.
이종철 작가는 뚜렷한 감정적 존재감을 지녔다.
자인제노에서 만난 그의 전시회 온도가 뜻밖이었던 이유다.
이종철 작가의 허물없는 따뜻함과 사뭇 달리, <<Chroma Threads>> 내 설치 작품들은 치밀하게 중립적이었다.
세 개의 패널과 쇠 막대를 활용한 설치 작품들은 곧고 현대적인 직선의 힘을 양껏 활용한다. 선들은 직각으로 만나거나 교차한다. 이 얽힘은 다시 너르게 비워진 갤러리 안 세 곳에 각각 놓여 3차원적 공간감을 극대화한다.
납작한 패널은 선명한 컬러 혹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만져질 듯한 표면을 사심없는 속도로 스트리밍한다—마치 무수한 바이트(byte)의 정보가 오류 하나 없는 흐름을 타며 처리되고 투사되듯.
“보통 감각보다는 구조나 개연성에서 [작품을] 시작해요. 그러다보면 작품이 좀 건조해지지만 그게 제 성향인 것 같아요. 제 천성이예요.”
이종철 작가의 작품을 하나하나 짚다 보면 어떤 2항 구조를 만나게 된다.
2차원과 3차원 세계, 재현과 추상, “실재”와 가상 세계, 다색과 단색.
그렇다고 이러한 2항이 늘 고립된 평행선 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양자는 그 경계를 중심으로 한 대치 공간을 거의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가깝게 병치된다.
때로 양자는 겹치고 서로 감싸 안으며 단단해 보였던 경계에 실금을 낸다.
미디어 아트는 차가운가? 따뜻한가? 둘 사이를 진동하는 편이 더 재미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패널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로 정렬된 패널을 타고 흐르는 감각적 색채의 표면은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유럽 도시들을 목적 없이 걷던 중 우연히 발견한 벽의 일부다. 그는 대부분의 표면을 슬럼에서 찾았다고 한다.
채색된 벽면만큼이나 두드러진 질감을 지닌 흑백의 표면 역시 뜻밖의 만남의 흔적이다. 단색의 패인 자국과 벽의 상흔은 호주 멜버른의 육군 방산 보안 전시회장 주변에서 진행되었던 반전 시위의 조각들이다.
이 감각적 이미지들은 각각 매끄러운 디지털 패널 아래에 갇혀있다. 마치 오브제로 넘쳐 나는 온라인 세계에서 유저의 시선을 사로잡으려 애쓰는 시각적 유혹처럼.
하지만 이 고립된 이미지들이 꿰어지면(threaded) 새로운 무언가가 생긴다.
고립되었던 조각이 퀼트의 일부가 된다.
때로는 꿰어진 조각들이 심지어 공동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화려한 빛깔 뒤에 가린 경제적으로 불안한 삶의 이야기.
그 과정이 거무스름하고 아픈 파괴를 동반할지라도 세계 평화로 향하는 희망과 행동의 이야기.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다른 존재와 연결한다.
이종철 작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에 얼마나 능숙했는지 문득 떠올랐다.
그가 가지각색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데에 능란했다는 점도.
그렇다면 이러한 2항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닐까?
아니면 그 이중 구조 자체가 2항의 의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질문이 잘못된 걸까?
이종철 “미디어 아트가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이종철 작가가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줄곧 이어왔다면 그가 어떤 아티스트인지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디지털 시대의 진정한 인간 관계의 모양을 말할 수도, 흡입력 넘침과 동시에 불안한 미디어 세계를 담을 수도 있다. 혹은 한계가 없기에 황홀한 그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종철 작가의 작품 세계는 너무나 다채로운 나머지 일관된 형체가 없을 정도다.
이를테면 <<Baroque 2.0>>에 포함된 작품들을 포함한 다른 창작물은 그 모양과 감성이 <<Chroma Threads>> 속 작품들과 전혀 다르다.
매혹적인 먹빛으로 흐르는 꽃과 인공적이고 평평한 픽셀로 이루어진 본 아크릴 페인팅 작품에서는 <<Chroma Threads>>와 달리(물론 여기서도 쉽지는 않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어떤 이야기를 도출해 내기 지극히 어렵다.
캔버스에 재현된 건 꽃이지만 작가가 딱히 꽃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꽃은 그저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렇게 눈을 붙잡아두면 시각적으로 덜 즐거운 캔버스 안 다른 요소들도 흡수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이종철은 능수능란한 작가다.
수은은 어떤 모양의 용기도 빈 공간 없이 매끄럽게 채울 수 있다. 많은 요소가 뒤섞인 합금으로부터 순수한 금과 은을 추출할 수 있는 기제이기도 하다.
독립적이면서도 변화에 즉각 반응하기에 수은은 다른 사물의 모양이나 속성을 오롯이 드러내는 기제가 될 수 있다.
캔버스에 아크릴 (이미지: 작가 제공)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임의로 선택된 요소들(꽃 대신 케이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이 이루는 시각적 대조다. 이 요소들은 나란히 놓이기도, 겹치기도 한다.
이 기묘한 요소 묶음을 바라보고 있으면 소셜미디어 피드를 (강박적으로) 스크롤링하다 반짝 스쳐 지나가는 관능적인 꽃잎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종철 작가의 이중 구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말자.
그렇다면 이종철 작가는 여전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건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뼈대/구조, 매커니즘,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힘.
빈 뼈대에 옷을 입힐 수 있는 방법은 수만 가지다.
머큐리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상반된 세계를 오간다. 그리고 두 세계의 간극과 뜻밖의 접속을 매번 다른 모양의 이야기로 전달한다. 그 모양은 그가 지금 서 있는 장, 지금 솟아오르는 감정, 그리고 지금 듣는 사람의 성정을 닮는다.
머큐리의 다면적 이야기는 순진한 청자들을 매혹하기도, 완전한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 구조가 무엇을 하는지 묻자.
이종철 작가는 구조가 있는 이야기를 전달해 왔다.
그의 이야기 안에는 일상에서 주워온 임의적 조각들이 모여있다.
그 조각들의 감각적 떨림은 디지털 세계의 기술적 논리를 매개하여 처리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신체 반응들이 자극되고 충돌한다.
공간의 생기를 껴안으며 그 3차원적 깊이를 들이마시다가, 다음 순간 2차원의 금욕적 평평함과 만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 전환은 빠르다 못해 두 상충하는 상태 사이에서 진동하고, 양자의 간극을 아예 뭉그러뜨리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 위에서 이종철 작가는 온갖 적응 방법을 열렬히 유희한다.
사우스 로스앤젤레스 컨템포러리에서 주재 아티스트로 지내던 때, 작가는 스튜디오 주변에 버려진 사물들을 주워 모아온 후 이를 종이에 베껴내어 캔버스에 두 개의 대조된 화면을 만들었다. 캘리포니아 유레카에서 배태된 이 이야기는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 작가로 생활했던 특수한 조건을 엮어 내면서 “한국인”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게 했던 이질적 환경에 대해 두런거린다.
이종철 작가의 구조는 그를 둘러싼 사물의 속성을 끄집어 내어 보여준다.
작가는 지금 놓인 환경에 옹골지게 자리잡은 채, 이질적 사물들을 단순하지만 강력한 시스템을 매개하여 처리한다:
작가는 그가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인 것의 정반대가 무엇인지 탐색해 보기로 했다.
작품 속 흑백의 엄연한 대조에서 맹렬한 진동이 느껴진다:
#FFFFFF와 #000000 사이, 한국과 유레카의 밋밋한 흰색(혹은 색 없음) 사이, 이질적 발견(E[e]ureka])과 내밀한 재해석(Adaptations) 사이, 물리적 현재와 부재 사이.
몇 십여 년에 걸친 작가의 “적응들”을 꿰는, 저변의 단단한 비계가 만져진다.
하지만 구조에 기반한 유연함이 과연 ‘적응’일까, 아니면 ‘반복’일까?
이 다채로운 적응들이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낡게 되풀이하는 걸까?
종래에는, 작가가 모든 창조적 가능성을 소진하게 될까?
가상 세계 안 인간 관계와 공감의 속성, “외국인 아시안 작가”란 지표의 속성, …
온갖 예술적 시도를 거쳐오면서도 이종철 작가의 구조는 흔들린 적이 없다.
그의 이중 구조는 굳건하면서도 기묘하게 유동적이다. 외형 상의 금속적 절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조를 창의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생기 넘치는 기제로 만든다.
<Loose Tension – S007 Tranquil Objects>, 50x50cm, 패널에 혼합매체;
<Loose Tension – S001 Curious Thought>, 50x50cm, 패널에 혼합매체
(이미지 출처: 김재희, 바로뉴스)
만약 이종철 작가의 다음 작품이 어떤 모습일지 예상할 수 있었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이 되지 않는다.
이 매끄러운 시스템에서 다음엔 무엇이 나올까?